서울역사편찬원,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발간
서울역사편찬원,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발간
  • 여성훈 기자
  • 승인 2018.05.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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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통신=여성훈 기자) 서울역사편찬원(원장 김우철)은 일제강점기 서울사람(경성부민)들의 여가생활을 유형별로 조명하는 연구서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을 발간했다.

대로변의 번화가와 뒷골목의 유흥가, 음반 산업과 기생출신 여가수, 영화 관람과 영화산업, 선술집과 음주의 위계, 여름철 여가활동인 수영과 수영장, 외식문화의 형성과 경성의 향토음식, 오락장과 공인된 도박장 등을 다룬 총 7편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의 의미를 넘어 민족․계층․계급의 차별을 드러내고, 갈등과 조정을 거쳐 그 차별을 사회적으로 승인하도록 하는 힘이 됐던 100년 전 경성부민의 여가. 그 천태만상의 여가생활을 들여다봄으로써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혼재되어 형성된 우리 일상생활의 변화상을 추적하고 나아가 2천년 서울 역사의 체계화한다는 취지다. 

여가생활이 필수적이란 관념은 근대에 들어와 형성됐다. 
3․1운동으로 위기에 봉착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교화’를 위해 다양한 여가시설을 확대했다. 공원․도서관․운동장 등의 공공시설물뿐만 아니라 극장․영화관 등의 관람시설, 카페․바․주점․음식점 등의 유흥시설, 경마장․마작장․당구장․골프장 등의 오락시설을 확대하는 한편, <흥행취체규칙興行取締規則>을 제정해 여가시설 통제를 위한 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라디오와 음반 등이 새로운 취미로 등장하고, 외식은 ‘행복한 가정’을 표상하는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대두했다. 이때부터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여가생활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도 사회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련되고 번화한 풍경이 들어선 경성의 도심은 식민통치와 근대사회가 교차하면서 경성부민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키는 구심력 역할을 했다. 반면 일본에서 유입된 유곽과 변두리․뒷골목의 색주가․내외주점은 구심력에 의해 강제된 일상생활이 분비하는 피로․욕망․좌절 등이 산재하던 공간이었다.
당대 일상 삶에서 비롯한 피로와 슬픔으로 인해 세련되고 화려한 여가문화에 더 빠져드는 사람들과 피로와 슬픔을 잊지 못하고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생활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했던 곳이 바로 식민도시 경성이었다.

경성의 음반 산업은 음악 녹음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본사에 의존하는 식민적 산업구조로 성장했다.
일본 본사와 조선을 연결하는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은 일본 유학파이거나 조선의 언론 및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일본 제국에 의해 만들어진 ‘슬픈 이미지’라는 조선인의 심성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다.
1930년대 인기 여가수 중에 기생출신이 많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음악적으로 훈련돼 있다는 이유 외에도 기생이 주는 정체되고 전근대적 이미지와 섹슈얼리티적 시선이 투사된 결과였다. 이처럼 대중음악을 통해 발견되는 대중적 심성이 내면화된 식민주의와 깊게 연루됐다는 점은 문화 소비가 개인의 기호와 취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서울 사람들이 영화관 가는 과정은 도심으로 나아가 아스팔트 길, 전차, 백화점, 카페, 음식점 등 화려한 근대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었고, 영화라는 근대 테크놀로지의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행위였다.
1910~1930년대 중반 무성영화시대의 영화 관람은 필름 교체 사이에 각종 공연 프로그램이 연출되고 영화 내용을 소개하는 변사의 해설이 가미된 형태로서, 공연과 변사 해설에 대한 관객의 호응 또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에 따라 무성영화시대의 영화 텍스트는 그것이 생산된 원본 그대로의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변용과 ‘오독’ 과정을 거쳐 수용됐다는 특징을 지닌다.

한편, 다른 여가 활동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기생․여학생․기혼여성이 영화 관람의 주체로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 영화 관람에서 주목할 현상이다.

이용자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이용하는 술집이 다르고 그런 술집에서 나오는 안주와 음주문화 역시 달랐다.
선술집은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반면 요릿집과 카페는 번듯한 건물에 입주했고 근대적 시설도 구비했다. 선술집에서 흰 막걸리를 마셨지만 카페에선 ‘붉은 술 푸른 술’을 마셨다. 내외주점 ‘고용녀’는 한복을 입고 동백기름에 머리를 재운 전통여성의 모습을 띠었다면 카페 여급은 단발․양장에 ‘살빛 비단 양말을 치켜 신어’ 세련미를 과시하는 근대 여성을 흉내냈다. 또 선술집에선 왁자지껄한 소리에 막걸리 마시는 소리가 있었다면 카페에선 양주잔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째즈’가 흐르고 일본어가 넘쳐났다.
 빠와 카페를 통해 근대 일본의 음주문화가 경성에 퍼져나갔고 그곳의 에로 분위기는 선술집에도 영향을 미쳐 선술집에 밀실을 두고 작부를 고용하는 ‘개량 선술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강 수영장은 여름에는 피서지로, 겨울에는 스케이트장 및 낚시터로 변신하며 행락지로 명성을 떨쳤다. 인도교․뚝섬․서빙고 등지의 수영장은 하루에도 2만~3만 명이 찾을 만큼 서울 사람들의 물놀이의 핵심이었다.
인공적 ‘풀’을 만드는 기술이 도입되어 경성운동장과 용산의 철도국, 각급학교 내에 수영장이 들어섰고, 풀에서 진행된 수영강습과 수영대회는 스포츠로서의 수영술 확산과 궤를 같이 하면 전개됐다. 세검정 등 전통시대의 피서지였던 계곡에도 계곡 물을 막아 수영장으로 쓰는 형태가 등장하기도 했다.
전시체제기에 들어서자 경성부 학무과는 ‘황군 전사’가 될 아동들의 체력 향상을 위해 여름방학 동안 학생들을 합숙시키며 안양․퇴계원 등지의 풀에서 수영 연습을 시켰으며, 징병 대상자를 대상으로 한 수영 강습회도 개최됐다. 이렇게 조선의 행락시설은 전쟁의 수행을 위해 이바지하는 곳으로 변질되어갔다. 
 
외식문화는 대다수 조선 사람들에겐 접근이 불가능한 세계였다. 상류층의 소수의 남성이 조선․일본요리집에서 외식을 즐겼고, 극소수의 모던한 남녀․가정만이 서양음식점과 백화점을 드나들며 근대문명을 경험하는 일이 가능했다.
경성의 향토음식으로 부각된 것은 당시 가장 대중화․일반화된 음식(설렁탕․갈비 등)이나 여타 지역과 다른 맛과 모양(약식․약과․색절편 등)을 띠는 것들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외식문화는 당시 복잡한 시대상황에서 전통적 사회관계가 붕괴되고 식민도시의 성장 속에서 가정과 개인이 재조직되는 양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화행위였다.    

도시화에 따른 일상공간의 분할 속에서 오락장은 일상의 피로․고통․권태를 풀어 낼 수 있고 또 익명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공공장소로 오락장은 등장했다. 그러나 공공시설로서의 오락장은 등장과 동시에 오락의 다른 모습인 도박의 출현을 수반했다.  
경마장은 3․1운동 직후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오락시설의 하나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도박행위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경마장 밖의 경마 도박을 불법화했다. 근대 권력의 개입은 오락장의 도박화를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락적 도박’을 승인하는 효과를 발생시켰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은 서울 소재 공공도서관 등에 무상으로 배포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며, 구입을 원할 경우 신청사 시민청의 서울책방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책값은 1만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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