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남북관계 70년사와 전망’ 특강, 남북관계의 흐름을 조망한다
4월 18일 ‘남북관계 70년사와 전망’ 특강, 남북관계의 흐름을 조망한다
내외통신 주최, 하석태 전 경희대학교 경영학과 교수·현 코레일네트웍스 교통사업본부장 강연
4월 18일 오후 7시 양천구 목동 청소년수련관 대극장에서 개최
  • 이유정 기자
  • 승인 2019.04.09 1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석태 전 경희대학교 경영학과 교수·현 코레일네트웍스 교통사업본부장
하석태 전 경희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현 코레일네트웍스 교통사업본부장

[내외통신] 이유정 기자= 내외통신이 ‘남북관계 70년사와 전망’을 주제로 4월 18일 오후 7시 양천구 목동 청소년수련관 대극장에서 특강을 개최한다.

이 날 특강에는 하석태 전 경희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현 코레일네트웍스 교통사업본부장이 강사로 참여한다. 그는 18대 대선 민주당 서울시공동선대 위원장, 19대 대선 문재인 후보 정무특보,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 유세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하석태 교수는 최근 수년간 다양한 시민 강좌를 진행해 왔으며 인문사회학적 관점과 역사적 사건들을 연관시키면서 우리사회가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냉철한 분석과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대사로 신선한 충격과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있다.

 

다음은 남북의 역사와 앞으로의 남북관계에 대한 하석태 교수의 일문일답이다.

최초 남북 분열의 시작과 원인은 무엇이라 보는가?

1945년 8월 22일,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하고, 1945년 9월 8일, 미국군이 서울에 입성하였다. 이는 한반도 분열의 시작이었다.
1946년 1월 16일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의에서 38도선 합의가 있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남북 분단이 남북한 외 강대국들의 의지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문제가 없었을까? 1948년 4월, 남북 정치협상이 평양에서 열렸다. 남측의 김구, 김규식과 북측의 김일성, 김두봉 등이 참석하여 남북한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했고 불행히도 북한의 1948년 9월 9일 북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에 앞서서 8월 15일 남한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찾을 수 없고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이 남북 분단의 원인 중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한 때가 언제인가?

박정희 정부 때이다. 박정희 집권 18년간 치열한 남북 간의 공방이 있었고 박대통령 암살을 하고자 하는 여러 차례의 북한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 광복 25주년을 계기로 남북대화 의사를 표명한다.

한국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박정희의 지시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한다. 이후락은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정하였다.

그 후 남한은 유신헌법 제정, 북한은 주체헌법 제정 등을 통하여 박정희와 김일성은 남북회담을 자신들의 체제 유지에 이용했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등으로 다시 남북 긴장관계가 조성 되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보수 군사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하여 국내 체제 안정을 추구하면서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역대 정부 중 최초로 북한 최고 지도자에게 정상회담을 제의한 대통령이 누구인가?

김대중 정부가 최초로 정상회담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 부분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전두환 정권은 남북 대화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북한에 정상회담까지 제의했던 실용주의적 군사정권이었다. 1983년 10월 9일 북한이 버마의 수도 랑군 중심지 아웅산 묘소를 폭파시켜 암살을 시도를 했다. 이로 인해 남한의 장관급 5명이 목숨을 잃고 민관의 희생자가 21명, 부상자가 46명에 달했다.

그러나 1984년 9월 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가 막심한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 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5 만석(7천 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다. 전두환은 1년 전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 간 최초의 경제 회담도 시작했다. 1985년 전두환은 북측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북측 역시 같은 해 9월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 대통령과 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노태우 정권 때의 남북관계는 어떠했나?

노태우 정권 또한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었다. 1988년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을 통해 북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규정했다. 또한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따라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이 완전 통일 이전에 상호 공존하는 과도기로서 ‘남북연합’을 설정함으로써 전면 대결이 아닌 화해협력의 틈새를 열어놓았다. 이 때부터 남북경협이 시작되었고 1990년엔 본격적인 교류협력을 대비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방 외교는 비록 군사정권의 연장이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못지않은 진취적이고도 포용적인 대북정책을 시도했고 일부 실질적으로 실현시킨 해방 이후 당시까지 남북 긴장 완화와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진일보한 실용 정부였다. 대북포용정책의 체계화는 김대중 정부 시기에 정립되었지만 사실 포용정책의 내용과 방향은 노태우 정부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한다.

김영삼 정부를 ‘보수도 진보도 아닌 철학 부재 정부’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1994년 7월 25일 남북정상회담 예정을 앞두고 1994년 7월 8일 북한 김일성 주석이 돌연 사망하게 되자 조문사절단 파견 문제로 남한은 극심한 국론 분열을 겪게 된다. 정부는 조문단 파견과 분향소 설치를 불법으로 규정한다. 물론 6.25 발발과 민족상잔의 당사자로서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대하여 조의를 표하는 것은 남한 보수주의 정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주석 사망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대화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면 정부가 북측에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 김영삼 정부 철학 부재의 극치는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전후한 정부 방침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제네바 북미합의 전후, 북미 공동 합의문 발표와 파기의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에 맡겨놓은 채 김영삼 정부의 역할은 전무했다. 대단히 무능했던 정권이고 경제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에서도 IMF 위기를 자초했던 정권이다. 바로 직전의 노태우 정부가 이룩한 남북 긴장완화와 남북연합 포용정책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었고 오히려 퇴보한 잃어버린 5년이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북한 붕괴’, ‘통일 대박’ 등을 언급했다. 이 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남북대화 그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해버렸다. 북한을 국내 정치용으로만 이용했고 남북관계의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 했다. 북한 체제는 곧 무너질 것이라 믿고 북한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키면서 북한 붕괴론, 통일 대박론 등을 공언했다.
더욱이 천안함 사건과 개성공단 폐쇄 등을 계기로 북한 또한 남한 정부의 남북대화의 진정성을 의심했고 북한은 오히려 핵의 고도화에 집중했다. 이명박 정부는 소고기 파동,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후에 북한을 이용한 국내 민심 반전을 꾀했으나 북한은 공식적으로 대화를 거부하고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이명박 정부와의 비공식적인 대화 사실 조차 공표해 버렸다. 심지어는 이명박 정부의 현금 매수 시도까지 폭로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6.15선언과 10.4 공동성명 내용과 정신을 모두 무시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2000년 6.15 선언 후 바로 그 해 11월 미국 부시 대통령 당선과 동시에 제네바 합의 파기,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선언함으로써 6.15 합의는 물거품이 되었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 정권 말기 10.4 공동선언 후, 12월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것 또한 10.4 공동선언 파기의 시작이었다.

6.15 선언과 10.4 선언이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계승, 발전 되었다면 현재의 남북한 관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발전했을 것이다. 상호간의 경제발전은 물론 족히 세계적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천지개벽이 이루어졌으리라고 본다. 그 만큼 통일 가능성도 높아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잃어버린 9년이었다.

남북 관계라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소를 실은 트럭이 끝도 없이 북한으로 달려가던 장면과 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노란색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넘어가던 장면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김대중-김정일 6.15선언문을 보면 추상적이고 어찌 보면 남북한을 두 남녀로 비유한다면 낭만적인 설레임이 가득한 감성적 분위기까지 엿보인다. 그러나 2007년 10월 4일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공동선언은 대단히 실용적이며 남북한의 구체적인 평화 구현과 경제 공동체 실현 방안이 서술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두 번의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특히 두 번째 정상회담은 사전공유 없이 갑작스럽게 진행해 더 놀라웠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나?

2018년 4월 27일과 5월 26일, 한 달 안에 판문점에서 무려 두 차례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과 비굴과 굴욕을 견디어 내는 전략적 지도자 리더십과 김정은 위원장이 16세 이래 갈고 닦은 군사 전략적 혜안이 서로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본다.

김정은 위원장은 16세에 아버지 김정일의 대비 외교노선을 비판하면서, “현재의 김정일 위원장의 정책적 방향으로는 미국은 절대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 직접적 군사적 위협이 될 때 회담에 응할 것이다.”라고 언명한 바 있다. 이 발언을 통해 북한이 핵 고도화에 집중한 것 또한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평택 미군사기지에까지 가서 맞이했고 정상회담 다음 날, 비무장지대 합동 방문에 앞서서 새벽 4시에 기상해 미리 가서 맞이했다.
그 진정성이 트럼프 대통령을 감동시켰다고 본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는 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공식적으로 100% 지지했다. 이것이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고 본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정상 두 사람을 설득하여 한반도 평화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한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전략적 인내의 리더(Leader of Strategic Endurance)로 기억할 것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주요한 원인이 무엇이라 보나?

문정인 통일안보외교특보의 지적대로 첫째 트럼프 대통령의 과욕, 둘째 김정은 위원장의 과신, 셋째 코언 청문회로 요약 할 수 있으나 내년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트럼프대통령으로서는 별다른 외교적 성과가 없이 내년까지 버티기 보다는 ‘북미 평화협정이라는 큰 이슈를 선거 직전까지 가서 써먹어야 자신의 재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정을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트럼프는 지금까지의 인생이 김정은 위원장 못지않게 ‘벼랑 끝 전술’을 즐기는 사람이다. 무려 4번 파산신청을 하고 6번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 자신의 기업을 성장시킨 불퇴전의 인물이다. 트럼프는 자신이 갑의 위치라면 을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철저한 딜러의 모습을 이번에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참모들간에 합의한 4개항에 싸인을 거부하면서도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우리 꼭 다시 만나야한다”라고 말을 건네면서 웃으면서 작별을 고하는 모습은 우리도 배워야할 대목이라고 본다.

앞으로 남북한의 전망은 어떤가?

남북관계를 이념적으로 보는 것은 냉전시대 논리이고 경제적 관점에서 조명해야 한다고 본다. 남북간의 정치적 통일은 불가능하고 우선 경제 공동체 구현은 가능하고 남북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된다.

2017년 세계 각국의 GDP와 인구를 비교해 볼 때 대한민국이 차지하는 경제적 위상은 놀랍다. 인구가 2배 이상 되는 러시아보다 더 많은 GDP를 기록했다. (러시아: 1조 4천 억 달러, 인구 1억 4천4백만 / 한국: 1조 5천억 달러 인구 5천1백만)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원조 특수, 베트남 특수, 중동 특수, 3저 특수, 중국 특수 등을 통하여 획기적인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 이제 북한 특수가 앞으로 2세기 이후의 한국경제 발전의 획기적 견인차가 되리라고 본다. 6.15 선언, 10.4 선언, 4.27 선언 등에서 합의한 군사긴장완화와 경제, 문화교류가 이뤄진다면 남북은 그 동안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썼던 군사비가 경제 중흥과 복지에 투입되어 경천동지할 변화가 예상된다.

경의선을 통하여 멀리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런던, 모스크바로 연결되는 동북아와 유라시아는 물론 세계 경제 중심지로 한반도가 탈바꿈 될 것이다. 남한과 북한은 고립된 섬에서 해방되고 5 천년 역사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 번영기를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