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통신]디지털뉴스부=
지붕 쳐다보기
아무런 생각 없이 앞을 보고 걷다 보니
버스가 지나간다
미처 정류장까지 못 갔는데
타야 하는데
못 타면 무언가 뒤처진다는 느낌으로
버스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된바람에 얼굴이 따갑고 숨이 차오른다
막차도 아니고
뛰어가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원인모를 조바심이 덜컹거리며 내려앉는다
억눌린 삶은 이렇듯 매양 분주하다
하늘이 에메랄드빛으로 맑아도
가로수에서 후드득 마른 잎이 떨어져도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몇 발짝 앞에서 휭하니 떠나는
버스의 뒤꽁무니다
불안하지 않은 삶이라면 모두를 버린 삶이다. 허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버린다는 건 이상향에 도달했다는 뜻이며 사람을 뛰어넘어 득도의 경지, 즉 신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왜 그것을 바라며 도달하려고 노력하게 될까. 삶이 힘들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던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어도 같은 고난을 겪는 게 사람이다. 높이 있으면 추락을 걱정하고 낮게 있으면 높이 오르려 걱정하는 양면의 얼굴을 가진 사람의 기질은 무엇에나 적응하는 것 같아도 아무것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욕망에 파묻혀 산다. 삶에서 조바심은 꼭 필요하다. 그게 없다면 살 수가 없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집단을 이루는 삶에서 남을 의식하고 경쟁해야 올바른 삶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면 병이다. 황인선 시인은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이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보편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의 근본적 태도를 그린다. 지붕은 가장 높은 곳이다. 집을 지으며 지반을 다지고 기둥을 세워 보를 얹힌 뒤 상량을 걸쳐 서까래를 치면 지붕이 되며 그 높이의 밑에서 사람은 살아간다. 자신이 만든 지붕 높이로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도 그것을 모르고 높이를 바란다. 일상에서 모든 것은 경쟁이라 여기며 그 속에 뛰어드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뒤처진다는 의식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의 삶은 허무와의 경쟁이며 자신과의 투쟁이 된다. 불행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황인선 시인은 첫 번째 시집 "추락의 깊이를 가늠하다"에서 작품 전부가 삶을 천착한 실행적인 모습을 보여줘 누구나 공감하는 작품을 그렸다. 놓치고 쳐다보는 높이의 꼭대기에 오르고픈 욕망의 조바심으로 결국에는 파국을 맞게 된다는 철학적 사유를 그린 것이다. [이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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