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통신 ‘시마을’/ 이오장 시인의 시 읽기
내외통신 ‘시마을’/ 이오장 시인의 시 읽기
  • 디지털 뉴스부
  • 승인 2023.11.1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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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통신]디지털 뉴스부=

그 자리

최영근

바람이 만나서

이슬 속에 누워 있는 생각을 만지던 자리

시간은 참외처럼 익어 갔다

달빛 없는 강가에

오가는 침묵의 소리

기다림은 늦가을 코스모스처럼 하늘거렸다

시 꽃 피워내던 밭에 두고 온

서정의 애틋한 손길

돌이킬 수 없는

바람이 흘리고 간 상념의 껍질

그림자마저 되돌아간

고독의 허상이 손을 흔든다

진홍빛 노을 떠난 빈 하늘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어딘가에 있을 빈자리를 찾아가는 바람의 이동은 파동을 만들고 사람의 상념을 흔든다. 앞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모습에 깨어난 굳어버린 상념이 말문을 열어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게 한다. 사람의 뇌는 가만히 두면 굳어버린다. 기억하는 모든 것을 잊는 건 순식간이다. 한 번 잊으면 다시 찾지 못하는 기억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인은 늘 언어의 뿌리를 찾고 캐어내어 다듬는다. 그 익음이 한여름의 참외처럼 노랗게 변했을 때 비로소 시의 탑은 시작되고 하늘과 별, 달빛과 어둠 속에서 봉우리를 얻는다. 시의 밭은 어디에 보관된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부딪치는 체험 속에 존재하며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에 따라 거기에 맞는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최영근 시인은 그 점을 잘 파악하였다. 참외처럼 익어가는 시간 속에서 침묵의 소리를 듣고 가느다란 실을 뽑듯 언어를 풀어낸다. 서정은 늘 보는 모습이고 고독이나 외로움은 잠깐잠깐 스쳐가는 상념이다. 그 상념을 얼마나 빨리 깨우게 하는 가에 시의 정점은 높아진다. 그러나 쉽지 않다. 체험으로 얻는 삶을 얼마나 밝고 경쾌하게 그려내는가에 따라 독자들의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그래도 망설일 것은 없다. 언제나 채워낼 하늘이 있지 않은가. 그림자는 언제나 뒤에 있으며 앞은 널따란 평지다. 시인은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서정의 장면은 연출되고 상념을 늘 깨어 있다. [이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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