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신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혁명과 전쟁의 전설적 리더십」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신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혁명과 전쟁의 전설적 리더십」
인간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교훈을 주는 “역사적 스승”
  • 전병인 기자
  • 승인 2022.07.2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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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통신]전병인 기자=강성학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가 신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혁명과 전쟁의 전설적 리더십: 혁명과 전쟁의 전설적 리더십」 (박영사, 551쪽)을 출간했다.

역사철학자 헤겔의 “세계사적 사나이”였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아들로 자처했지만   종국에는 프랑스 혁명을 말아먹은 “혁명의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9년 제1통령(the First Council)이 된 후에 그는 고대 로마의 킨키나투스(Cincinnatus) 대신에 시저의 길을 택했고, 그리고 근대에서는 미국의 독립혁명을 이끌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길을 가지 않고 영국 청교도 혁명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의 비극의 원초적 원인이었다. 19세기 중반 2월 혁명 후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도 혁명가-대통령-황제의 길, 즉 자기 큰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혁명의 목적이었던 민주 공화정을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비스마르크(Bismarck)의 프러시아에 패배한 뒤 프랑스에 제3 공화국의 탄생때까지 거의 1백년이나 후퇴시킨 셈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궁극적으로 그리스 비극의 테마처럼 자신의 오만(hubris)으로 인해 스스로 몰락한 단순히 하나의 비극적 인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폴레옹은 모든 의미에서 자기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기 시대의 구현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에 관해서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했는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를 역사적 맥락속에서 보아야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0년대에 세상에 등장했을 때 세계는 전쟁 중이었고 인간사회의 기본적 토대가 의문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자기이익을 위해 행동했고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조약을 파기하고 동맹국들을 배신했던 패권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세계였다. 모든 측의 군주, 정치가, 그리고 사령관들이 비슷한 수준의 무서운 침략, 욕심, 무감각, 그리고 만행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는 전장에서 승리가 영광의 극치였고, 그리고 나폴레옹의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영토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의견에 대해 그가 성취한 미증유의 지배에 대한 나폴레옹의 “위대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유일하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의 세계는 충분히 장엄하고 용기가 있었다면, 심지어 군사적인 패배에서 마저, “잘 죽는 것”(good death)이 어떤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나폴레옹의 시대를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이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에 관련된 어떤 국가에게 도덕적으로 우수한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역사적 속임수였고 또 권려의 욕구를 규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정치적 필연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1789년은 인류역사의 전환의 해였다. 그 해는 두개의 혁명을 품었다. 하나의 혁명의 완성을, 그리고 또 하나는 혁명의 시작이었다. 전자는 미국의 독립 혁명의 완성을 의미하는 공화정의 미합중국의 수립이고, 후자는 프랑스 대혁명 폭발이었다. 후자는 전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두개의 혁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전자가 자유와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혁명이었지만 후자는 평등의 구현을 위해 기존 신분계급을 타파하려는 공세적 혁명이었다. 전자의 상징적 인물이 조지 워싱턴이 이라면 후자의 상징적 인물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였다.

워싱턴은 희망의 정치를 의미했고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의 정치를 의미했다. 워싱턴은 후임자에게 자발적으로 정권을 물려주고 로마의 위대한 킨키나투스(Cincinnatus)의 길을 갔다면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폭군으로 루이 16세처럼 후임자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미국의 혁명이 1789년 독립 후 안정화에 돌입을 의미했다면 프랑스혁명은 불안정한 혼돈과 공포의 출발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혼돈과 공포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안정된 정치질서를 수호할 새로운 영웅이 절실히 필요했다. 바로 이때 혜성처럼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장군이었다. 그 순간부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장군-정치가(a general-stateman)가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비극적 종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의 아들”로 자처했던 나폴레옹의 유산은 인류의 역사발전에 긍정적으로도 기여했다. 나폴레옹은 말을 탄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on horseback)를 대변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20세기에 등장한 전체주의적 독제자가 아니었다. 그가 미증유의 효율적인 감시체제를 수립했을 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는 자기 신민들의 삶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또한 그는 그가 정복한 땅을 프랑스인들이 직접 통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 땅은 오직 주민들에 대해 승리함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 따라서 현지인들에게 자신을 동정적으로 만들 조건으로 자신을 제시하려고 모색했다. 무엇 보다도 그는 유럽을 근대화하기를 희망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스토리는 단지 그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했으며 왜 궁극적으로 실패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근대 유럽의 형성에 기여했는가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자신들 깊숙한 내면 속에 무엇이 있는가, 즉 인간본성과 그것이 압력과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 지에 관한 분석이다.

우리는 나폴레옹 야심적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의 실례를 통해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의 비극적 종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에게 중요한 많은 정치적 및 군사적 교훈들을 얻을 수 있을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은 21세기 우리에게 여전히 인간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교훈을 주는 적어도 “역사적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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