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사 주지 성묵스님,팔정도를 수행하며 육바라밀을 닦아 나가겠습니다
시방사 주지 성묵스님,팔정도를 수행하며 육바라밀을 닦아 나가겠습니다
열악한 포교 조건 속에서 마무리한 극락보전 조성
  • 김동표 기자
  • 승인 2016.01.24 2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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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2월 시방사에서 열린 극락전 낙성 및 탱화 점안법회에는 강진군불교사암연합회장 법정스님을 비롯 지역사암 스님과 신도 200여명이 동참했다. (사진=김동표기자)
(내외통신=김동표기자)극락보전(極樂寶殿)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서 극락정토가 있다고 한다. 극락은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미타불은 성불 전에는 한 나라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法藏比丘)이다. 여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고,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光明無量), 그 수명이 한량없어 백천억 겁으로도 셀 수 없다(壽命無量). 따라서 극락전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전남 강진군 농촌마을에 아미타도량이 우뚝 섰다. 구랍(舊臘) 13일 강진군 군동명 신기마을에 자리한 시방사(주지 성묵스님)에서 극락전 낙성 및 탱화 점안법회가 열렸다. 이날 법회에는 강진군불교사암연합회장 법정스님을 비롯 지역사암 스님과 신도 200여명이 동참했다.

대한불교조계종 18교구 말사로 등록된 시방사는 37년 전 한 비구니 스님이 임법당을 지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10여 년 전 성묵스님이 주지소임을 맡으면서 사찰 형식으로 재 창건이 시작됐다. 성묵 스님은 지난 10여 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사찰 창건의 과정을 마무리하는 극락보전 낙성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성묵 스님은 사부대중들에게 감사의 3배를 올리며 “부처님의 법을 수행하는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어 감사하다”며 “인간의 몸을 받고 있을 때 부지런히 수행정진해 은혜를 갚도록 하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시방사 극락전은 전면 3칸 60㎡ 규모의 다포계 양식 전통목조 건물이며, 새로 조성한 아미타불 삼존불과 후불탱, 신중탱을 점안했다.

사막에 탑을 쌓는 정신으로 살아와

성묵스님이 시방사에 처음 온 것은 10여 년 전. 150리 떨어진 곳에서 주지소임을 맡고 있던 그는 시방사포교단장과의 만남을 갖게 된다.

포교단장의 시방사 칠성법회를 부탁을 받고 온 성묵스님은 그렇게 시방사와 인연을 맺게 되어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

▲ 시방사 주지성묵스님(사진=김동표기자)
성묵스님은 “시방사는 비구니 스님이 임법당을 지으면서 시작됐다”며 “부처님 법당을 세우겠다고 원을 세웠지만 여러 가지 연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비구니 스님은 한(恨)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며 “칠석날 이곳에 와보니 절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전라도 지역은 경상도 지역에 비해 불교세가 약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폐허가 된 도량을 다시 불사한다는 것은 싶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성묵스님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런 스님께 포교단장은 “스님께서 이곳에 계시다면 제가 법당을 짓겠으니,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포교단장의 청과 창건주의 정신을 받든 성묵스님은 시방사에 머물게 됐으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포교단장은 다른 연유로 법당을 지을 수 없게 됐고, 절터마저 경매에 넘어갔다.

절 마당에 차도 들어올 수 없고, 지붕도 낡아 물이 새는 곳에 스님만 남게 된 것이다. 스님은 “제가 11설부터 행자생활을 하면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지었다”며 “그 인내로 불모지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사막에 탑을 쌓는 정신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극락보전 완공으로 10년 원력 마무리

시방사를 재창건 하겠다는 원을 세운 성묵스님은 우선 도량을 수리하고, 종각을 지었다. 기와도 입히고 단청도 했다. 산신각도 지었다. 그렇게 시방사는 조금씩 도량으로 틀을 갖춰 나갔다.

하지만 극락보전은 조성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법당을 지을 땅도 부족했다. 스님은 불사금을 조성하며 법당을 짓기 위해 지난 10년간 앞만 보고 달려왔다.

스님은 “극락보전 부처님 도량하나만 짓고 생을 마감해도 좋다는 원을 세우고 앞만 보고 왔다”며 “이곳은 아주 불모지다. 500여명 문중도반스님들께서도 이곳은 살 수 없는 곳에 산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또, 성묵스님은 “부처님은 인과법인데, 그것을 피해갈수는 없다”며 “행동 하나하나 내 생애 지을 업보를 이어 나갔다. 근검절약하며 살아왔다”고 전했다.

▲ 지난해 12월13일 강진군 군동명 신기마을에 자리한 시방사(주지 성묵스님)에서 극락전 낙성 및 탱화 점안법회가 열렸다. (사진=김동표기자)
시방사가 위치한 이곳은 여느 농촌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민들 대부분이 고령자들이다. 시방사 신도들도 노(老)보살들이었지만 신심이 강했다. 스님은 그 같은 보살님들과 힘을 합쳤다. 함께 나무를 주워 땔감으로 사용했다. 곡식을 판돈으로 부처님전에 시주하는 보살님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모았다.

공양주 없이 홀로 기거하며 원력을 세워나갔고, 10여년 만에 극락보전 완공으로 원력을 마무리했다. 스님은 “어렵게 돈을 만들어서 극락보전을 지었다. 불사가 엄청 힘들었다”며 “말로 표현을 다 할 수 없다. 낙성식때 신도들을 부처님으로 여기고 삼배를 드렸다. 최상의 불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시절인연이 닿아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지식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진정한 행복을 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종교의 의미는 나의 정화를 통하여 세상사의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 인간의 삶을 성숙하게 해주며, 사후세계에 대한 인간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부처님 법을 따르는 자를 수행자라고 한다.

수행자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취한바와 같은 깨달음을 위해 나아가는 자를 말한다. 성묵스님은 “진정한 불제자는 우선 남을 쓰다듬고 사랑하며 이끌어 줘야 한다”며 “자기 자신은 항상 가슴에 칼을 갈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옳고 그름을 구분할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그렇게 올바른 불제자로 살아가더라도 복(福)밭을 이어나가기 어렵고, 중생을 이끌어 제도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시절인연이 되어야 한다. 세속에 사는 사람이던 승려집단이던 시절인연이 닿아야 한다. 복밭이 그런 열매를 만들어서 따먹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항상 부처님 법을 가깝게 하며, 참된 성품을 보려면 항상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부처님의 길로 한걸음 다가 갈수 있다”며 “십이연기법을 터득하고 팔정도를 실천해서 육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지혜의 눈을 떠서 어떤 유혹에도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전했다.

끝으로 성묵 스님은“허공의 마음자리와 내 마음자리가 하나가 된다”며 “호흡에서 하나의 씨앗이 된다. 항상 정신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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